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동로마 제국/역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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=== 7세기 중반, [[이슬람 제국|이슬람의 발흥]]과 슬라브족의 남하 === 동로마 제국은 사산 왕조와의 기나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지만, 같은 시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[[무함마드]]에 의해 [[이슬람|이슬람교]]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. 결국 서로간의 전쟁에 지쳐버린 두 나라는 7세기 중반 이후 시작된 [[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]]와 [[아므르 이븐 알 아스]]와 [[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]]를 앞세운 [[이슬람/정복|이슬람 군대의 공격]]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고, 결국 잇따라 패배하게 된다. 게다가 제국의 경우, 황제의 노환과[* 페르시아 전쟁을 마치고 나서는 전쟁터에 한 번도 직접 나가 싸운 적은 없다. 시리아를 뺏기고 떠날 때 시리아에 대한 작별 인사를 남겼다고 하니, 콘스탄티노플 바깥에 아예 안 나갔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, 시리아에 가서도 직접 싸웠던 것은 아니었다.] 교리 논쟁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분열되어 나가는 등 온갖 추가적 악재와 사산 왕조와의 결전 + 이전의 역병까지 겹친 상태에서 [[로마-아랍 전쟁|이슬람 침공]]을 받은 결과, 레반트와 이집트를 영구히 상실했고[* 특히 이집트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싫다고 [[콥트 정교회]]를 중심으로 자진해서 이슬람에 항복해버렸다. 이들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교회를 가진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슬람에 의한 [[세계정복]]을 외치는 이슬람 세력이 이교도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고, 때문에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이 해군을 보내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탈환했을 때 이들은 동로마군을 열렬히 환영했다. 다만 그 이후에 이집트 등 합성론 교회 신자들이 아랍 해군에 대거 입대한 것을 보면 동로마군에 환영한 사람들은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.], 가까이 있는 데다가 패전 크리에 왕위 계승 분쟁까지 겹쳐있던 사산 왕조는 아예 멸망해버리고 왕족들은 중국 당나라로 망명한다. [[이슬람 제국]]은 [[정통 칼리파 시대|정통 칼리파 왕조]]가 무너지고 [[우마이야 왕조]]가 설립이 되면서도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.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한 아랍인들은 허구한 날 제국령 아나톨리아를 습격했고, 674~678년 사이에는 [[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|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]]하기에 이르렀다. 제국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켜냈지만, 아나톨리아에 대한 아랍인들의 습격은 조금도 주춤하지 않았다. 또한 [[마스트 해전]]의 패배로 [[지중해]]가 로마의 호수이던 시절은 완전히 끝났고, 지중해에는 사라센들이 들끓었다. 기원전의 공화정 후기 시절부터 인근의 유럽, 지중해, 중동 일대에서 단일 세력으로는 항상[* 5세기 초중반의 훈 제국이 있지 않나 할 수 있지만, 그 당시 동서로마를 따로 보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도 있으며, 또한 [[유목 제국]] 특성상 실 국력 대비 전투력이 유난히 강했던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. 역으로 말하면 전투력 대비 실 국력은 형편없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.] 국력 지표상으로 1등이었던 시절도 이슬람 제국에게 엄청난 영토를 정복당하면서 끝났고, 2등으로 내려앉았다. 이에 국력이 약화된 제국을 노리고 [[슬라브족의 이동|북방에서 슬라브계 민족들이 침공해 들어왔다.]] 이들의 공세로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[[테살로니카]], [[트라키아]] 일대, [[그리스]] 및 [[달마티아]]의 몇몇 해안 거점들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. 심지어 640~660년대의 [[콘스탄스 2세]] 당시에 [[불가리아 제1제국]] 성립 전 [[불가르족]]의 일파가 그리스까지 내려가서 [[코린토스]]를 점령했었다는 것을[* 이는 약 250년 정도 후 [[시메온 대제]]의 [[시메온 전쟁]] 때 반복된다.] 시사하는 논문도 존재한다.([[https://www.jstor.org/stable/2853091|The Emperor Constans II and '''the Capture of Corinth by the Onogur Bulgars''']]) 670~680년대에는 불가르족이 다뉴브 강 남쪽으로 남하해왔고, 제국군은 온갈 전투에서 이에 대한 저지에 실패하여 681년 [[제1차 불가리아 제국]]의 성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. 결국 불가르족은 많은 슬라브 부족들을 제압하고 발칸 반도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. 결국 제국이 [[20년간의 혼란]]에 빠져있던 698년에 카르타고마저 함락되면서 북아프리카도 상실하고 이집트나 시리아 탈환도 무산되어 버렸다.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아있던 지역은 [[그리스어]]와 [[칼케돈 공의회|칼케돈]]파 기독교를 중심으로 결속하게 되어 이전보다는 훨씬 더 견고하고 높은 응집력을 갖게 되었다.[* 당시는 수상무역 및 수상교통의 효율과 속도가 육상의 같은 그것보다 월등하게 좋았기도 했고, 그 넓은 영역을 육로로만 가거나 육로 위주로 다니면 한 세월이 걸렸으므로, 로마가 지중해 해상권을 꽉 잡고 있던 7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도시가 지중해 해안가이거나, 혹은 지중해로 흘러나오면서 선박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있는 강 유역에 위치해있는지의 여부가 그들의 정체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. 지역 및 민족의 정체성에 상관없이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고전적(classical)인 도시문화와 귀족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. 이와 반대로 지중해로의 접근이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했던 내륙 지대, 혹은 해안 지역이라도 이 당시에는 지중해보다 지정학적인 의미나 가치 면에서 훨씬 뒤떨어졌던 대서양, 그리고 북해에 면해 있고 지중해와는 멀었던 곳들(노르당미, 브르타뉴, 갈리아 서해안, 히스파니아 북해안 등)은 그저 배후지였고 이 지중해 해상 네트워크에서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러야만 했다.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, 이 시기의 제국은 '배로 지중해로의 접근이 가능한 도시들과 이를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내륙 군사거점 및 그 배후지들의 묶음'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. 'Thersites the Historian' 유튜브의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OQMu3imBSiU|Byzantine Dark Ages]]의 초반에도 비슷한 논지의 내용이 나오며, 이외에도 이 점을 적시하는 자료들이 여럿 있다.][* 상술한 내용들은 당연하게도 지중해가 로마의 호수이며 지중해 해안에 로마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. 그런데 이슬람 제국의 등장으로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.] 이러한 가운데서 이탈리아는 제국의 유일한 비그리스어권[* 당연하게도 라틴어권이었다.]이었고 이로 인해 제국 본토/본국[* 발칸 반도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육료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본국/본토라는 명칭을 선택했다. 엄밀히 따지자면 아나톨리아 지역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육로로 이어져 있지는 않지만, [[보스포루스 해협]]의 폭이 좁은 곳은 '''700m'''인 곳도 있다고 하니 이탈리아와는 전혀 경우가 다르다. 참고로 발칸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사이에 있는 [[아드리아해]]의 평균 폭은 약 '''175km'''이다.]과의 이질성이 특히나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.[* 7세기 말부터는 교황의 이탈리아 내 권위가 라벤나 총독을 압도하게 되었다. 기록으로 남아 있는 라벤나 총독들 중 마지막에서 6번째이자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로 넘어가는 시기에 맡았던 [[요안니스 2세 플라티노스|요안니스 '''2세''' 플라티노스]]부터는 위키 문서에 교황이 동로마 당국의 말을 안 듣기 시작했던 것은 물론 현지의 이탈리아인들도 동로마 당국에 대해서는 경원시하여 교황 vs 제국의 구도가 될 경우 대부분이 교황의 편을 들어주었던 모습이 나온다. 총독인데도 마치 군주처럼 '2세'가 붙어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, 이탈리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상당히 멀어서 어느 정도의 지방자치가 강제되었으며 또한 제국의 원래 발상지라는 큰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에, 7세기 중반에 [[테마 제도]]를 도입하여 문·무 권력을 한 손에 쥐어준 원 동로마 지역보다 수십년이나 앞선 584년부터 문·무를 모두 통할했으며, 그 재량의 정도 또한 다른 지방관에 비해 매우 높아 그야말로 엄청난 권력자라서 그 위상이 프랑크·랑고바르드·서고트 같은 다른 서유럽 왕국들의 왕에 버금갔다. 그런데 7세기 말부터 확실하게 교황에게 밀렸던 것이다.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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